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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남 신부 메시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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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희의 삶을 통해 회개와 거룩함의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을 때 비로소 바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심지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정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그에 목마르고 늘 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사랑과 마음과 존재 전체를 드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도구 삼아 그분과 대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은 사람의 언어이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거나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적이 있어도 이제는 그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입니다.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 아닌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 재물이나 쾌락 그리고 오락 등에 모든 시간과 마음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리는 없고, 당연히 기도 역시 그 자리가 없습니다.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도가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뒤에 있거나 아예 아주 순위 자체를 두고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기도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아니 최고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기도를 우리 삶의 맨 첫자리에 두라고 강조하십니다.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죄 중에 있거나 늘 죄와 유혹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우리를 유혹하고 죄짓게 합니다. 죄 지은 사람은 원죄를 짓고 하느님의 눈을 피해 자신의 몸을 숨겼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에게서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죄의 속성과 결과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끊어버리게 만듭니다. 죄 짓게 되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 역시 어렵게 됩니다. 심지어 기도에서 손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기도로부터 멀어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는 사람, 기도를 우리 삶의 맨 첫자리에 두는 사람 그리고 죄를 피하고 매일같이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부활시기에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과 몸짓 그리고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희의 삶을 통해 회개와 거룩함의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기도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을 회개와 거룩함의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위해 가장 우선하는 전제조건은 예수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야 우리가 내외적으로 회개하고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기도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통로가 되고, 그 사랑이 그들에게 전해 주는 전도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 흘러들어가는 예수님의 그 사랑이 그들을 회개하게 만들고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면 그들 역시 여전히 기도에서 멀어져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랑이 흘러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연결 통로, 전도체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도로 불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명을 받고 매일매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파견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하는 거울로 매일매일 파견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3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달 성모님 메시지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메주고리예 야고보 본당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위와 같은 이번 달 메시지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왜 이렇게 메시지가 짧지? 혹시 누군가의 실수 때문에 나머지 부분들이 누락되어 홈페이지에 올라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주고리예 메시지 관련 다른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봤습니다. 역시 같은 짧은 메시지였습니다. 요즘 들어 이처럼 짧은 메시지는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짧은 메시지를 대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987년 1월부터는 매월 25일에 메시지를 주고 계시지만, 발현 초기인 1984년 3월 1일부터 1987년 1월 8일까지 성모님께서는 매주 목요일에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1984년 4월 26일, 5월 31일, 6월 14일, 6월 28일, 1985년 9월 19일, 이렇게 다섯 번 메시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짧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와 한마음이 되어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1984년 4월 19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1984년 6월 21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1984년 8월 23일) 
   흥미롭게도 이 세 개의 짧은 메시지들 모두 기도에 관한 메시지들입니다. 지난 42년 동안 성모님께서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 절대적으로 많은 것이 바로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발현 초기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시는 성모님께서는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결코 지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회개할 수 없고, 믿음도 성장하지 않으며, 하느님 가까이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그 무엇보다도 기도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에 매일같이 물을 주고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고, 살아 있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메말라 죽고 맙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숨을 쉬어야 우리 몸이 살 수 있듯이 기도해야 우리 영혼이 숨을 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전히 기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발현 초기의 메시지처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그에 응답하여 매일같이,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다면 성모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 당신과 한 마음이 되어 온 마음으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라는 이번 달 메시지를 접하면서 언젠가 이와 거의 같은 메시지를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2009년 7월 25일이었습니다. 그때 성모님께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번 달 메시지와 비교하여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 외에는 완전히 똑같습니다. 
   2009년 7월 18일 저는 수련기를 마치고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기 위한 첫서약을 했습니다. 2주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한국에 가는 대신 메주고리예 순례를 갔습니다. 이제 겨우 첫서약을 한 유기서원자 신분이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갈색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복을 입고 메주고리예 순례를 했기 때문에 기분이 아주 남달랐습니다. 수련기 동안에는 메주고리예를 갈 수 없었고, 이제 한 고비를 넘었으니 성모님께 감사드리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꼭 메주고리예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참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제 개인적으로 뜻깊은 메주고리예 순례 중 7월 25일에 오늘과 거의 비슷한 성모님 메시지를 받았고, 짧지만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성모님은 역시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모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변함 없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충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기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있을지라도 성모님은 그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기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바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이 귀한 시기를 보다 더 귀한 시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또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죽음입니다. 멸망입니다. 이것을 막는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고, 그분과 하나가 되며 그분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우리가 하느님의 전 인류 구원 계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 뜻도 알게 됩니다. 기도해야 생명과 구원의 길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이제 구원의 때가 찼습니다. 지금 이 시기가 구원의 때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성모님 말씀처럼 이 시기를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의 때가 되게 한다면 우리는 그 구원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당신의 부름에 응답할 것이라고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2023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고,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기도하며 겸손하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평화를 찾아라. 


회개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의 회개만 필요하다면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로부터 회개해야 하고,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느님을 잊고 살기 때문에 거듭거듭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작업은 우리가 눈을 감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서야 비로소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고 짓지 않아야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해서 거기에서 실망하고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우리 가톨릭 교회의 첫번째 교황이었던 베드로 사도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성목요일 밤 예수님께서 곧 붙잡혀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사도들이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성전 경비병들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들에게 체포되셨을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저 가야파의 관저로 끌려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대사저의 관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의 두 여종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발견하고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세 차례나 물었습니다. 그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고, 심지어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 때 너는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나옵니다.(마태 26, 31-35;69-75 참조)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하늘로부터 환시를 받아 쓰여진 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혹독한 수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대사저의 관저를 나오다가 그 안에서 그는 사도 요한이 모시고 온 성모님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 그를 안타까우면서도 여전히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성모님의 그 눈길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속 참회하고 회개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그의 배반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요한 21, 15-17 참조)

   베드로처럼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한 사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유다 이스카리웃 입니다. 그는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와 함께 게세마니 동산으로 와서 예수님의 체포를 돕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뉘우치고는 은전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에게 돌려 주고 나가서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마태26, 14-16, 47-50; 27, 3-5 참조)

   베드로와 유다가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이후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잠시 뉘우치기는 했으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막아 버렸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히 죄를 피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하겠지만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회개하며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계속해서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했다는 외적인 표징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한 달에 여러 번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주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우리는 계속 회개했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대신하는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받을 때 우리에게 엄청난 하느님의 자비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입는 자루옷을 속죄할 때에도 입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재나 흙을 얹고 자루옷을 입고 단식하며 속죄했습니다.(느헤 9, 1 참조) 그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입으라고 하시는데 그 옷은 어떤 것일까요? 구약의 자루옷과 같은 그 어떤 외형적인 옷이 아니라 속죄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온 마음으로 우리 죄를 인식하고 뉘우치고 그 죄를 기워 갚기 위해 기도, 단식, 그외 자선 활동 등을 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속죄의 옷을 입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를 오르시고 거기에서 그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속죄의 옷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옷을 입을 차례입니다. 우리 죄와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십자가 속죄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저는 카푸친 작은형제회 회원이기 때문에 긴꼬깔 모자가 달려 있는 갈색 수도복을 입습니다. 이 수도복은 제가 누구인지를 내적으로 또 외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징입니다. 저는 수도복을 입음으로써 제 자신이 수도자임을 더욱 자각하게 됩니다.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동네에서 마트에 갈 때도, 다른 볼 일들을 볼 때도 수도복을 입고 갑니다. 물론 우리 신자인 필리핀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 이 동네에서 유일한 아시아계 남자이기에 늘 눈에 띄지만 제 수도복 착용 때문에 더욱 도드라집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도복 착용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 증거라고 생각되기에 늘 수도복을 입고 다닙니다. 게다가 제가 처음 수도복 착복을 할 때 ‘프란치스칸 수도복은 십자가의 형상이다.’ 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수도복을 입고 다니려고 노력합니다. 어찌보면 수도복은 제게 속죄의 옷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 6)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 14)

 

이 은총의 시기에 사탄은 너희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계속해서 내 아들을 바라다봐야 하고,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창세기 3장에서는 뱀으로 표상되는 사탄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원죄를 짓게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우리의 첫 선조를 유혹한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그들과 하느님의 관계, 그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다른 피조물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그들을 유혹했고, 그들은 그 거짓말을 참으로 받아들여 선악과를 따먹었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고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거짓말장이인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 4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이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던 그분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사탄의 거짓말 유혹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마태 4, 1-11 참조)

   예수님까지도 유혹했던 그 사탄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영혼들을 파괴하기 위해 그의 졸개 마귀들과 함께 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모님 메시지처럼 그는 우리를 포함한 온 인류를 유혹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따르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의 거짓말은 무척 달콤하고 근사하고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는 우리의 행복이나 생명, 구원과 평화에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그는 우리를 거짓말로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죽음과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사탄의 거짓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눈 앞에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선악과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생명 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우리는 광야에서 구리 뱀을 쳐다보고 살아났던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민수 21, 9 참조)

사탄은 심지어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더 많이 가지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온갖 것을 소유하고 갖은 욕망에 우리 자신을 맡기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고 물질과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며 그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택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산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죄를 속죄하고 원죄로 닫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모님 말씀처럼 포기하고 단식하면서 갈바리아를 향해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갈바리아를 향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를 사랑하도록 허락하시고,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라나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의 기쁨 쪽으로 너희를 인도하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예수님 잉태를 예고하기 위해 성모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최초 만민의 어머니 하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말을 듣고 죄를 지어 인류에게 죽음을 불러 들였지지만 새로운 만민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낮추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심으로써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그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 명령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라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그런 자세 자체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 모범을 따르면서 그분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2023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 사탄이 마음들과 사람들 안에서 전쟁과 증오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단식과 보속으로 너희의 나날들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여라. 현대인이 하느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가 기로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인류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가 내 희망이다. 내가 파티마에서 시작하고 여기서 실현될 것에 대해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기도가 되고 너희 주변에 평화를 증거하며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와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 사탄이 마음들과 사람들 안에서 전쟁과 증오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단식과 보속으로 너희의 나날들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여라.

성모님께서 당신과 함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머니와 그 자녀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기도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그 자녀들이 함께 기도하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 그리고 거룩한 여인들이 함께 기도를 바쳤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 14)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함께 한마음으로’ 입니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그들은 몸도 함께 있었고, 마음도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을 때, 우리는 몸만 성모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한마음이 되어 평화를 위해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티 없으신 성모님의 성심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지만 성모님과 함께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모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마음으로 바뀌어 그분과 온전히 하나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모님과 함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사탄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초자연적 능력의 영적 존재인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과 사람들에게서 평화를 앗아 가기 위해 전쟁과 증오를 부추키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위력이나 더 큰 무력과 적대감으로 그를 막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만이, 사랑과 평화와 선으로 가득한 기도만이 그를 저지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 메시지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즉 성령마저도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며 평화를 청할 때 그를 반드시 들어주십니다.(참조 루카 11, 13)
   사랑의 본질은 희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그 육화의 사건에서 하느님은 희생하는 사랑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모습으로 이 지상에 오셨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육화, 성체성사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하느님의 모범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단식과 보속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뉘우치고 그에 대신하여 속죄 행위를 하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단식과 보속을 나날이 실천함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처럼 진정으로 희생할 줄 아는 사람,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현대인이 하느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가 기로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인류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류에게 모든 것이 다 현대화되어 있습니다. 과학, 기계, 기술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하여 인류에게 엄청난 혜택과 편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없이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예컨대, 앞으로 일주일, 아니 하루만 온 인류가 스마트폰을 쓸 수 없고, 써서는 안된다고 누군가 강제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세상은 뒤집어질 것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예를 들어 봤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 자동차, 세탁기, 냉장고 등과 같은 것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기술문명에 따른 발전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과연 현대인이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더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잘 살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잘 살고 있다면 지상의 모든 것들을 꿰뚫어 보시는 천상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현대인이 하느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가 기로에 놓여 있다. 그 때문에 인류를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인류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삶에서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현대인의 삶에서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모님께서 이미 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시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현재 인류는 하느님 없는 문명을 건설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하느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교만이 인류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니, 인류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질이나 더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애타게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발길을 돌려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그 길만이 현대인이 미래를 얻고 멸망에서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린 자녀들인 너희가 내 희망이다. 내가 파티마에서 시작하고 여기서 실현될 것에 대해 나와 함께 기도하여라. 기도가 되고 너희 주변에 평화를 증거하며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어린 자녀들인 우리가 당신의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감히 무엇이건대 성모님께서 우리를 가리켜 당신의 희망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몸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작은 우리들을 그렇게 대해 주시니 무척 고마우면서도 엄청난 부담과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왜 성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지만 하느님을 원하고 오직 그분만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기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파티마에서 시작하신 것은 티 없으신 당신 성심의 승리 예고였습니다. 이제 그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이 메주고리예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로부터 승리를 얻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사탄으로부터의 완전한 승리입니다. 성모님께서 승리하시고 사탄은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지옥으로 영원히 감금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때는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치열한 전쟁 중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영적 전투에 우리를 당신의 군사로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갑옷은 티 없으신 성모 성심께 대한 봉헌이고, 우리의 무기는 기도, 특별히 묵주기도입니다. 
   성모님의 희망, 성모님의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로 완전히 무장되어야 합니다. 아니, 기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은 기도가 우리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을 뵈올 수 있고 그분의 평화를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으며, 그를 주변에 증거할 수 있고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022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마음을 바꾸어 주는 빛의 부름에 닫혀 있기 때문에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지도록 기도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마음을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평화의 왕을 모셔 들이기 위해 너희 자신을 열도록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마음을 바꾸어 주는 빛의 부름에 닫혀 있기 때문에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지도록 기도하여라.


예수님의 성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분 없이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아기,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그분께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진지하게 묻지도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모님께서는 이 성탄절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성모님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거울이 자신을 위해서 어떤 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바라다보는 그 어떤 사람을 위해 반사를 하듯이 우리를 바라다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의 반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고 그것들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그분의 평화, 천국의 선명함과 기쁨을 반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오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들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어느 동굴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어지셨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요셉의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조차 요셉이 데리고 온 그의 아내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요한 복음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 9-11) 

   성경은 베들레헴의 사람들과 달리 하늘로부터 온 빛에 마음을 연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2 킬로 미터 떨어져 있는, 현재 “목자들의 들판”이라 불리우는 광야에 살면서 양 떼를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마을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 묵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어느 동굴로 인도했습니다. 그 동굴은 가축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받으신 도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외에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의 모습을 직접 뵙고 그분을 알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구세주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주님의 천사가 그 목자들에게 다가가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천사는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리고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목자들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하늘의 평화, 예수님이 선물로 가장 먼저 주어졌던 것입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떠난 뒤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들은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알려 주신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들은 대로 믿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빛의 부름에 완전히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내했던 그 동굴로 가서 세상의 빛으로 탄생하신 구원자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습니다.(루카 1, 8-20 참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세 명의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하늘에 떴을 때 그 별을 보고 길을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동굴에 도착하여 크게 기뻐하고 귀한 선물들을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 탄생에 대한 구약 성경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구세주가 탄생할 때 그분의 별이 하늘에 뜬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밤이면 하늘을 쳐다보며 그 별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구세주의 별이 떴지만 그들의 마음은 구세주의 오심에 완전히 열려져 있었고 그분을 통한 구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는 이미 구원의 별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은 마음이 착하고 하늘이 알려 준 소식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늘은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그 마음이 더욱 활짝 열리고 구원자 아기 예수님을 직접 뵙는 은총을 특별히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들은 그곳에서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뵙고 그분의 영접을 받는 큰 영광도 체험했습니다. 빛의 부름을 받고 찾아와 자신들의 마음을 활짝 열고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경배를 드리는 그들을 바라다보셨던 성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하셨을지, 또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워 하셨을지 저절로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당시나 지금이나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과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이 자신들 위에 와서 비추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 빛의 부름에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하느님이시요 참인간이신 예수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곧 지나가고말 세상의 화려한 빛들에 마음을 두고 그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태워 죽이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들처럼 말입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죽음과 멸망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시는 성모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는 빛의 부름과 평화에 마음이 열리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처럼 되어야 하지만 그를 넘어서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마음을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평화의 왕을 모셔 들이기 위해 너희 자신을 열도록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은 늘 함께 있고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바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온기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을 열도록 기도해 주고 계시는 성모님의 그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의 마음을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 활짝 열어야 하겠습니다.


   
 
 
2022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에게 기도를 가르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고 계신다. 기도는 마음들을 열고 희망을 주며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킨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사랑으로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너희의 희망이시니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죽음이 아니라 회개와 생명을 선택하도록 너희를 인도해 주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너희에게 기도를 가르치도록 나를 너희에게 보내고 계신다. 기도는 마음들을 열고 희망을 주며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킨다.


지난 11월 21일은 성모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성모자헌축일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세 살 어린 나이로 성전에 봉헌되셨는데 그곳에서 11년간을 사시며 사제들의 제의를 비롯한 성전 제사에 사용된 빨래들을 빠는 봉사를 했고, 여선생님들의 지도하에 다른 어린 동정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어린 동정녀들을 뽑아 성전에서 살게 한 것은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전통에 따라 세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이 성전 봉사 동정녀로 선발되었습니다. 그 선발 과정에서 어린 마리아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려온 사제들로부터 엄격한 시험을 치르셔야 했는데 놀라운 지혜로 그들을 감탄케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린 마리아께서는 사제들이 물어보기도 전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성전 동정녀들이 한 밤중에 일어나 한 번 기도해야 하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나서 밤에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 대답에 사제들은 감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조상님들은 구세주 메시아의 오심을 열망하던 에세네라 불리우는 경건한 사람들 공동체에 속한 분들이었고, 그 부모님 요아킴과 안나 성녀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부모님은 성모님의 잉태 순간부터 그분이 구세주를 잉태하실 동정녀라는 계시를 받았고, 그들의 딸 어린 마리아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열망하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으며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마리아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기도를 배우셨던 마리아,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님들 그리고 다른 동정녀들과 함께 끊임없기 기도를 바치며 기도 속에서 사셨던 마리아께서는 나자렛 집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잉태하시리라는 예고를 들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과 요셉 성인과 함께 나자렛 성가정 생활을 하시면서 그분들과 함께 기도하셨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는 거룩한 여인들과 함께 기도하시면서 예수님과 제자들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 중심에 계시면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9년 동안 에페소가 내려다보이는 셀죽 산 위에 지어진 집에 사시면서 당신을 돕던 동정녀와 함께 기도에 전념하시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셨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진정한 기도의 여인이셨습니다. 성모님은 기도를 통해 언제나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에 들어가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셨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찾으셨습니다. 하느님만이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셨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오직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만 모든 사랑을 드렸고 성부의 딸, 성자의 어머니 그리고 성령의 정배가 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느님, 지극히 높으신 그 하느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가장 기도에 전념하셨던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기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십니까?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인류는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기도를 게을리하고 있는지 하느님을 잘 알고 계시고 이를 안타까워 하시기에 이를 도와주기 위해 성모님을 보내 기도를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최소한의 의무적인 기도를 바치고, 그것마저도 마음을 다해서가 아니라 입으로만 드리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왜 기도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기도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까지의 메시지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서,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가 삶이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기도의 효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기도는 마음들을 열어 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수많은 여러 마음들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이웃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마음의 문도 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진 하느님의 그 마음에서 사랑과 은총과 자비가 우리에게 쏟아져 내립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의 힘으로 그 사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재와 전구의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두번째로 기도는 희망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께 우리의 희망을 두게 됩니다. 사랑, 평화, 용서, 기쁨 등 기도의 열매가 수없이 많지만 희망 역시 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는 기도는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여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기도하게 만들고 우리의 믿음을 점점 자라나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 믿음을 더욱더 굳건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에 관한 책을 수많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사랑으로 너희를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너희의 희망이시니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성모님은 그냥 우리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대해 가지고 계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모님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떠한 지 2009년 3월 18일 발현목격증인 미리야나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너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말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천상적 사랑, 즉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중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희망을 그분께 둘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우리 곁에 계시고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힘을 내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발걸음을 돌려 우리의 사랑,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너희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죽음이 아니라 회개와 생명을 선택하도록 너희를 인도해 주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들을 해왔는지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지나간 날들의 선택들이 아주 잘못되고 죄스러웠다면 그 회한이 무척 클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희망이시기에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제 좋은 선택들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바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 이 지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행복과 생명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더 큰 집과 더 좋은 자동차 그리고 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분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 없이 살아간다면 진정한 미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모시고 산다면, 그분을 선택한다면 우리에게 참된 미래가 있습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물질적인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그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두고 살아 갑시다.


   
 
 
2022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인류가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한 기쁨과 희망의 길이 되도록 허락하신다. 하느님이 없으면 너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 주기 위해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의 사랑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사랑의 도구가 되어라. 너희의 믿음을 기쁘게 증거하고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가운데서 희망을 잃지 마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나의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인류가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한 기쁨과 희망의 길이 되도록 허락하신다. 하느님이 없으면 너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 주기 위해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올해 3월 25일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인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너희를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도록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렇게 강하고 격한 표현으로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 구원과 멸망의 기로에 서 있는 인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과 성모님의 슬프고 연민 가득한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7개월이 지난 이번 10월 25일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표현을 쓰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인류가 기로에 서 있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과 죽음, 구원과 멸망의 기로에 선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을 선택하도록 주의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 16-17)라고 하신 주 하느님의 주의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지 않고 자기 욕망과 의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영원한 죽음을 선택했던 아담과 하와처럼 지금의 인류 역시 성모님의 메시지를 귀담아 듣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의 선물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입니다. 
   인류는 넘지 말아야 할 문턱을 넘어서서 이제 죽음의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럼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 다시 그 죽음의 방에서 나와 발길을 돌려 생명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그 길이 있습니다. 비록 인류가 죽음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죽음 힘을 다해 그 죽음의 길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직전에 있던 우도가 완전히 회개하여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 42-43 참조) 라는 말을 들으며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 인류에게도 마지막 순간이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 인류에게 그 기회를 마지막으로 주고 계십니다. 바로 성모님을 통해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인류가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인류가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위한 기쁨과 희망의 길이 되도록 허락하신다. 하느님이 없으면 너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알려 주기 위해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비록 인류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시 그곳에서 빼내어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모님을 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눈에 인류는 고장나면 버려지는 물건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아무리 병들고 망가져도 마지막 순간까지 돌보고 고쳐서 다시금 온전하게 만들려고 하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과 성모님의 그 한없는 사랑과 연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걸고 그것을 쳐다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살았습니다. (민수 21, 4-9 참조) 오늘날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선택한 인류에게 구리 뱀이 아니라 성모님을 보내시어 당신께로 돌아와 생명과 구원을 얻도록 촉구하십니다. 하느님의 예언자이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이 없으면 미래가 없고 그분이 계시면 미래가 있으니, 하느님께로 시선과 발길을 돌려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따라가라고 인류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의 사랑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사랑의 도구가 되어라. 너희의 믿음을 기쁘게 증거하고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가운데서 희망을 잃지 마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나의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랑의 도구가 되려면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안에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보지 못하고 그 사랑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이 체험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힘만으로 체험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열고 기도로 그 선물을 주십사고 간청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목말라 하는 자녀의 간절한 청을 절대로 외면하실 하느님이 아니시기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사랑의 도구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애(마태 5, 45 참조) 우리도 그분처럼 그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의 도구의 크기에 연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아주 작아 보일지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여지는 도구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먼저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의 마음은 수시로 변합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처지, 목표와 여러 가지 주변 상황들 그리고 사람들 때문에 자주 바뀝니다. 물론 이를 전부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변하는 마음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변하지 않고 충실하시며 믿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희망하며, 두려워하지 마라.”고 한 오상의 비오 성인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모든 희망을 두며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믿음을 기쁘게 증거하며 살아갑시다.

 

   
 
 
2022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성령께서 너희를 깨우쳐 주시어 너희가 기쁘게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끝없이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다시금 너희를 부르고 있다. 용기를 내고 하느님께서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를 통해 하고 계시는 선한 일들을 증거하여라.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너희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그것은 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선이 될 것이다. 사탄이 전쟁과 평화 없는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성령께서 너희를 깨우쳐 주시어 너희가 기쁘게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끝없이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라.

하느님 아버지의 따님이신 성모님께서는 당신 정배 성령의 힘으로 성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세주로 낳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성령의 힘을 가장 먼저, 또 가장 강력하게 체험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 성령의 힘을 체험하셨던 성모님은 이번 달 메시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성모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완고하고 우리 의견과 주장만이 가장 옳다고 믿고 그를 따라 살아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완고함과 경직된 사고를 깨뜨리고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의 의견이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견과 뜻에 따라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초월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도들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중심으로 살고, 오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만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모님 가르침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어떤 의무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쁘게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또 모든 경계를 넘어서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을 우리 주변에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정배이신 성모님께서 스테파노 곱비 신부를 통해 주신 당신의 메시지 모음집 『성모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 사제들에게』에서 가르쳐 주신 다음 기도를 기회가 닿는 대로 끊임없이 바칩시다. “오소서, 성령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당신 정배 마리아의 힘 있는 전구를 들으시어 오소서!”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다시금 너희를 부르고 있다. 용기를 내고 하느님께서 너희 안에서 그리고 너희를 통해 하고 계시는 선한 일들을 증거하여라. 

우리의 나이에 상관없이 성모님의 눈에 우리 모두는 그저 어린 자녀들일 뿐입니다. 그런 어린 자녀들인 우리를 성모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냥 옆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를 거룩함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현존과 동반은 우리에 대한 그분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성모님의 어린 자녀들이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모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낙담에 빠져 있거나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용기를 내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렇듯이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어린 자녀들인 우리가 겪고 있는 낙담과 어려움 그리고 불행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성모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하고 계시는 선한 일들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하느님 때문에 우리가 백배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우쳐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선한 일들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입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 43, 1-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그 상황 자체보다 그 안에서 선한 일을 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먼저 머리에 떠올리고 그분께 의지하면서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고 계시는 그분의 선한 일들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너희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그것은 이 지상에서 너희에게 선이 될 것이다. 사탄이 전쟁과 평화 없는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위협받고 있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거짓되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참되고 지속적이고 심지어 영원한 것이기를 바라십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그런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선의 근원이시기에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닮은 존재,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된 선한 존재이기에 선하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행하는 모든 선은 하늘에 쌓는 복이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선으로 돌아옵니다. 그 모든 것을 지켜 보시는 하느님께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선행을 우리에게 선이 되는 축복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느님과 그분을 닮아 선을 행하는 우리와 달리 모든 악의 근원인 사탄은 자기 졸개 마귀들과 함께 하느님께 반역하는 악을 저지르고 우리 인간을 온갖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멸망시키려고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는 총체적인 악의 집합체인 전쟁을 조장하고, 사람들 마음과 가정 그리고 이 세상에서 평화를 없게 만들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도 그 심각성을 깨닫고 그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무엇으로 전쟁과 평화 없는 상태를 원하는 사탄과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싸움이기에 영적인 무기로 대항해야 합니다. 그 무기는 바로 평화를 위한 단식과 기도입니다. 특별히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사탄이 파괴하려고 위협하고 있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 우리 가정, 우리 이웃, 우리 나라 그리고 온 세상에 평화가 넘치도록 매일매일 온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2022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개인적 평화를 통해 세상에 평화를 건설한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가 너희와 함께 만들고 싶어 하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을 너희에게 주시도록,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개인적 평화를 통해 세상에 평화를 건설한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과 활동 그리고 메시지 모두 하느님의 계획과 허락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모님의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성모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온 마음으로 느끼고 깨닫고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하느님 자신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 15)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과 그분의 활동 그리고 메시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성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모님은 오직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허락하시는 일만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그를 따름으로써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즉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라갈 때만 우리에게 평화가 선물로 주어지고 평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모범을 따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고 허락하시는 일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의 선물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평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지 곳곳에서 인류 구원 계획에 우리의 역할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클런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촛불 하나가 어두운 방 전체를 밝게 비추어 주는 것을 보면 우리 각자의 몫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큰 바다도 사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의 빗물들로 시작하여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그 끝에서 이루어지는 큰 물일 따름입니다. 모든 악이 각 개인 한 사람으로 인해 시작되듯이 모든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선으로 말미암아 그 선들이 모아져 거대한 공동의 선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먼저 시작됩니다. 이 세상의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우리 개인의 평화로부터 시작되고 우리 옆 사람에게 전달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이어져 마침내 큰 세상의 평화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 개인적으로 우리 안에 평화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 평화가 온 세상의 평화를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이웃과 세상에 우리 자신을 활짝 개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가 너희와 함께 만들고 싶어 하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을 너희에게 주시도록,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사랑은 늘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직접 표현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현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와 함께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자녀에게 좋은 미래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육신의 부모와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강한 애정을 가지고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당신 홀로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그렇게 하고자 하십니다. 또 자녀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것이 너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니 무조건 이 길로 가라.”고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는 그런 부모와는 달리,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의견을 들으시고 조언하시며 우리가 마음으로 따르도록 우리를 인도헤 주십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어리고 작기 때문에 절대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시고 우리와 함께 우리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일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미래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이 필요한데 그것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고, 그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우리도 예수님께 그 믿음과 희망을 주시도록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려는 그 어떤 노력이나 시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여자와 아이들 외에 오천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이후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래야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군중들을 돌려 보내신 후 산으로 올라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새벽까지 호수 위에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멈추었습니다.(마태 14, 22-33 참조)
   위 복음 말씀에서 제자들이 호수 위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풍랑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홀로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분을 뵈올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계셨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고 계셨으며 영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풍랑에 시달렸지만 난파를 당하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새벽녁에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이제 비로소 물리적인 현존이 이루어졌습니다. 겁에 질려 예수님을 유령으로 알아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이 세상에서 수 많은 인생의 시련과 풍랑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성모님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려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마라.”

   
 
 
2022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의 삶으로 많은 영혼들을 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모든 악을 정복하는 마음에 희망을 두고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기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너희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이들을 용서하고, 계속해서 거룩함의 길로 가거라. 내 아들은 너희를 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그분께 인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의 삶으로 많은 영혼들을 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성모님은 “너희의 삶으로 많은 영혼들을 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이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 “나는 너희를 믿는다. 너희는 할 수 있다.” 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시는 것같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이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 삶의 목표가 우리 자신의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그런 우리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지 저절로 상상이 됩니다. 혹시라도 사라져가고 있는 이 지상의 어떤 것에 우리 삶의 목표가 맞추어져 있다면, 성모님의 메시지에 따라 재조정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예수님 가까이 인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많은 영혼들을 당신의 아들 예수님 더 가까이 인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히 누구를 예수님 가까이에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아무리 말이 그럴듯해도 그것이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언젠가는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실제 행동으로 그분의 말씀을 살면서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죄스럽고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 없으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천상의 도움 없이 회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성향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성모님을 이 지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도와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모든 악을 정복하는 마음에 희망을 두고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기쁘게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라. 너희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이들을 용서하고, 계속해서 거룩함의 길로 가거라. 

마음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고, 이 마음에 따라서 우리 삶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고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악을 버리고 오직 선만을 선택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악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악은 우리 삶에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어느 정도의 균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악을 정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를 희망하면서 산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선한 마음 안에만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이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그것들을 기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받은 악한 영향 때문에 우리 안에 그 악한 영항을 준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을 계속 품고 있으면 결국 우리 자신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마음과 삶이 엉망이 되고 망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있으면 우리 마음은 지옥 그 자체이고 그를 떨쳐내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거룩한 삶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악한 영항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계속해서 거룩함으로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아들은 너희를 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그분께 인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후 다른 사도들이 보는 가운데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모님께서 “내 아들은 너희를 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그분께 인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길을 우리에게 정확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진리는 오직 당신 자신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 가야 하는 것이 그분 제자들인 우리의 운명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제가 다니던 성당 보좌신부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신부님 성함은 김재문 가브리엘이십니다. 젊으신 분이신데 만성신부전증에 걸리셨고, 합병증으로 실명까지 하셨으며, 그후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실명하여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김 신부님의 병실을 방문하여 김 신부님과 함께 병실에서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김 신부님에게 주례를 하도록 배려하셨고, 옆에서 신부님 미사 봉헌을 도와드리셨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김 신부님은 기억에 의존해 미사 경문을 외우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성체성혈 축성이 끝나고 이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김 신부님은 한참 침묵을 지켰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신부님이 혹시 주님이 기도를 바쳐야 하는 대목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긴 침묵이 지난 후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추기경님, 제가 이제 눈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 예수님께서 저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을 정말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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