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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예수님과 함께 너희의 새로운 삶을 살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생의 여러 시련 중에도 늘 굳건하고 기도 속에서 충실하며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상처들로 너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부활로 너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마라. 너희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증거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예수님과 함께 너희의 새로운 삶을 살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생의 여러 시련 중에도 늘 굳건하고 기도 속에서 충실하며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상처들로 너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부활로 너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성모님의 메시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부활 제2주일 복음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면 좋을 것같습니다. 가나다해 부활 제2주일 복음 모두 똑같습니다. 요한 복음 20장 1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복음 말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은 바로 몇일 전 예수님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곳에 있었지만 몇 일 전 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의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최후의 만찬인 줄도 모르고 과월절 저녁 식사를 하던 그 때 제자들은 마음이 기뻤습니다. 비록 그 만찬이 끝나고 자신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하여튼 그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시간은 제자들에게 기쁨이고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체포, 자신들의 배반,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체험하고 난 다음 그들은 이전과 같은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그 다락방은 훵하기만 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자기들 역시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었으나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그들에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죽음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기쁨도, 행복도, 평화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셨고, 제자들은 실제로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그들이 당신의 사도들이심을 재천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께서 그들을 당신의 제자, 사도들로 여기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을 그들에게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이는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 7)고 하신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었습니다. 또 용서를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다시 한 주간이 지난 다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사도 토마스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를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했지만 토마스는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고,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문은 다 잠겨 있었습니다. 역시 같은 다락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비록 문을 잠그고 있었어도 그들은 더 이상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그들 마음에 있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다락방에 나타나시어 토마스를 비롯한 제자들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평화를 빌어주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는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토마스의 마음에 의심이 있고, 다른 동료들 앞에서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자리에 육체적으로 계시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 만난 제자들은 마음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고 기쁨과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사도로서 같은 동료 토마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체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의 불신앙과 의심을 알아채시고 치유하시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더욱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활 제2주일 복음 요한 20, 19-31의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30절에서 31절까지인데 요한 복음서를 쓴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특별히 당신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동력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것도 사전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나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그들을 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 (히브4, 15)이시기에 오히려 그들이 믿음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 18) 또 당신을 배반했지만 부활하셔서 그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많은 시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가지 시련이 끝났는가 싶으면 생각지도 않게 또 다른 시련이 밀려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늘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굳건하고 기도 속에서 충실한 가운데 인내하며 그 모든 시련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찾아와 그들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기쁨과 평화를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 5)고 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상처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평화, 구원,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복음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마라. 너희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있기를 바란다. 너희가 내 사람이라는 기쁨을 증거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모성애로 너희 모두를 사랑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고 희망을 잃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시어 우리들 가운데 살아계시는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 놓이든지 늘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제가 비록 어둠을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 4)라고 항상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요한 복음 20장을 묵상하면서 살펴본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평화와 기쁨이 우리들 마음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로 주님을 우리 마음과 삶,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에 모셔옵시다.
우리가 성모님의 사람, 그분이 자녀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자체가 우리의 기쁨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람이라는 것을 기쁘게 증거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성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모님을 사랑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 아기처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묵주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성모님을 부르며 겸손하게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성모님의 마음으로 들어가고, 성모님께서는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는 성모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곳, 어느 시간에 있든지 묵주를 들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느새 성모님께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증거가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바리사이파처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으로 바쳐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움추려 들어 소극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특별히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마치 성모님의 손을 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잡은 손에서 전해져 오는 성모님의 모성적 사랑을 한껏 느껴봅시다.
2018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둠이 빛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은총의 시기에 기도속에서 나와 함께 있으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고백하며 은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라. 하느님을 선택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십자가는 너희를 위한 승리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너희가 세례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너희가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마음으로 감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둠이 빛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은총의 시기에 기도속에서 나와 함께 있으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기도하고 고백하며 은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악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인 사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끝나는 때에 사탄은 영광에 싸여 오시는 예수님께 완전히 패배당하고, 영원히 지옥에 감금될 것입니다. 그전까지 사탄은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용을 쓸 것이고, 우리를 예수님과 성모님으로부터 가능하면 멀리 떼어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사탄이 완전히 패배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사탄의 힘에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인 사탄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힘이 있고, 그 힘으로 우리가 잘 서 있다고 믿는 그 순간에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교만 때문에 예수님과 성모님이 들어오실 자리를 우리 스스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 순간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고, 쉽게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 대단히 강력한 존재이기에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더 힘센 원군이 필요합니다. 그 원군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묵시 12, 1)이신 성모님만이 붉은 용인 사탄과의 전투에서 우리 편이 되시어 우리를 보호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어둠이 빛과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은총의 시기에 기도속에서 나와 함께 있으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기도속에서 있으면 우리는 우리를 어둠, 즉 죄와 악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기도의 은총으로 빚, 즉 선과 그 선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르 14, 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이 존재하지만 그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편에 서 있고, 하느님의 힘을 받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다시금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악을 몰아내고, 죄의 상처들을 치유하기 우해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고 고해성사로 깨끗해진 영혼은 다시 은총 지위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 막바지에 이르러 있습니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영혼의 봄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기도와 고해성사가 우리 영혼의 봄을 준비시켜주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십자가는 너희를 위한 승리와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 즉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신명 30, 15-20)
사실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모세의 이 말씀은 천지창조 직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말씀이었고, 그 이후의 구약과 신약에서 계속된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계명과 뜻을 따르면 생명과 행복 그리고 축복을 받을 것이며, 그분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면 죽음과 불행 그리고 저주를 받는다.’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 진리는 성경 핵심 주제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선택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과 뜻을 따르며, 그분이 주시는 생명과 행복 그리고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면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에게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여 더욱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와 그 백성에게 내렸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온 몸으로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호렙산에 올라가 자리를 비운 40일 동안 그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라고 외쳤습니다.(탈출 32, 1-6 참조)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들과 그분의 놀라운 업적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체험했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분명히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지만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포기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몸은 간절하나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마르 14, 38) 우리지만 겟쎄마니 동산에서 고뇌하시며 천상 아버지과 그분의 뜻을 선택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가의 수난과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셨던 성자 예수님께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 42a)라고 기도하셨고, 고뇌에 쌓여 기도하시는 동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22, 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 42b)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면 반드시 승리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례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너희가 하느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마음으로 감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 백성, 예수님의 제자,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천주 성부 하느님께만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이처럼 큰 영예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만해도 마음이 뿌듯하지 않습니까?
이 천상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은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당신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이 말씀에 따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그리고 그들의 협력자들인 사제들을 통해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수많은 세례가 베풀어졌고, 수많은 민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바로 예수님의 명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그 명을 받은 사람들의 사도적 계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 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 한 생명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세례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 1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니,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세례를 통해 우리의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와 우리의 본죄로부터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의 용서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 3-6)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세례를 받은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하시고 이루신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다음과 같이 이를 긍정해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에페 1, 3-6)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좋으신 뜻에 따라 세상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우리를 당신 계획의 일부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자녀로 거룩하게 흠없이 살고, 당신이 이루시려고 하는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부르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보태는 어린 자녀들의 손을 부모님들이 결코 작게 여기지 않으시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계획을 위해 우리가 바치는 작은 노력과 정성을 고맙게 여기십니다. 좋으신 뜻에 따라 세상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당신 계획의 일부로 불러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마음으로 늘 감사드립시다.
2018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너희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계명들을 살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그 계명들은 성사들을 통해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세상과 세상적인 유혹들이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그분의 피조물들을 아름답고 겸손하게 바라보아라. 그리고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때에 너희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계명들을 살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그 계명들은 성사들을 통해 너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무엇이든 닫혀 있는 곳에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문을 닫아 걸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은총을 내려주시려고 해도 그 은총은 결코 우리에게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주시는 은총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때에 우리 자신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 마음과 영혼의 문을 열어 드립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살려면 우선 우리에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분께서 주신 계명들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우리를 속박하기 위해서 아니라 우리를 더욱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에 옮겨야 하는 주요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제2부에서 십계명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준수해야 하는 계명들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후 모세를 통해 주신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 생명, 행복, 축복 그리고 번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마련해주신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외의 다른 세부적인 계명들도 율법과 법령들로 주셨는데 그것들 역시 그 근간이 되는 십계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잘 살 수 있도록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폐지하러 오지 않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고,(마태 5, 17 참조) 모든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기에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구약을 통해 주신 계명들의 핵심을 정리해주셨습니다.(마르 12, 28-34 참조)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계명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계명들을 살라고, 나는 너희 모두를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을 다시 잘 살기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계명들에 비추어 어떤 점에서 우리의 삶이 어긋났는지 깊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계명들에 비추어 우리의 양심과 삶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또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는지 돌아다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즉 회개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계명들과 어긋난 삶을 살았던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 다시 계명들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세상과 세상적인 유혹들이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그분의 피조물들을 아름답고 겸손하게 바라보아라. 그리고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창세기 1장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포함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좋은 의도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좋은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의 관계가 서로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촉발된 원죄로 인해 이 모든 좋은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교만, 절제되지 않은 욕망, 분별없는 선택과 행동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여전히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각종 대중매체들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세상적인 것들을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놓으라고 인간을 유혹하고, 비도덕적이고 과도하며 무분별한 욕망을 부추키고 있습니다. 이 유혹과 시험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느님만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간 역시 그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피조물을 정복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주신 귀한 선물임을 깨닫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선을 바라보면서 겸손하게 감사 드려야 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하느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것 위에 계시고, 그분만이 모든 영광과 사랑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오직 그때만 하느님께서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2018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를 통해 너희에게 내려오시고, 너희가 회개하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의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어라. 그러면 그 증언들을 통해 너희는 또한 하느님과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너희를 먼지와 죄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들을 찾고, 지상의 것들은 지상에 내버려두어라. 너희는 거룩함에로 불리웠고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
2018년 새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늘 그러하듯이 “사랑하는 자녀들아!”라는 말씀으로 새해 첫 메시지를 시작하십니다. 매번 메시지마다 이 말씀을 하셔서 지나치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 보면, 성모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메주고리예 발현 36년 7개월 동안 아주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성모님께서는 메시지를 주실 때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너희가 나에게서 멀어져 있을 때에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성실하게 표현하셨습니다. 2018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성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모님이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메시지는 우리에 대한 성모님의 모성애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자녀의 안녕을 위해 사랑으로 내려주시는 메시지에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모든 메시지들을 깊이 받아 들이며, 그 메시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녀된 자의 참된 자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지금 즉시 기도에 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일 혹은 모레, 아니면 시간이 있을 때 기도하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모든 것에 앞서 기도를 맨앞자리에 두고자 다짐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바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라는 너무도 잘 아시기에 “이 때가 너희를 위한 기도의 때가 되기를 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를 통해 너희에게 내려오시고, 너희가 회개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사도들에게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 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모님 그리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 일을 루카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 12-14)
그렇게 사도들은 성모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분과 함께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이어진 여러 날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을 때, 마침내 성령께서 백 스무명의 초기 교회 공동체에 임하셨고,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증언을 하면서 회개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으로써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예수님께로 돌아서고, 더 이상 세상이나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홀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셨고,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전교회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셨던 성모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회개를 불러 일으켜주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면 성령께서 기도를 통해 너희에게 내려오시고, 너희가 회개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어라. 그러면 그 증언들을 통해 너희는 또한 하느님과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계획이나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먹은 대로 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마음 먹으면 우리는 거룩한 것을 행하려고 하고, 우리가 세속적인 것을 마음 먹으면 우리는 세속적인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거룩한 것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살기로 마음 먹고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것, 하느님께로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인간이 어떻게 구원되었는지,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하느님께 인간이 감사와 순종으로 성실하게 응답했을 때 어떤 축복과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그 반대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죄악으로 길로 갔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졌는지 등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신앙과 배반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알게 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좀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알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공부도 성경을 아는데 도움을 주지만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모르고, 성경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우리 마음에 오시기를 청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더 활짝 열어주시고,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틈을 자주 만들어서 성경을 열고,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너희를 먼지와 죄로 유혹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들을 찾고, 지상의 것들은 지상에 내버려두어라.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숨을 불어넣기 전까지는 살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이 없는 존재는 다만 그저 수많은 작은 먼지들로 이루어진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숨을 빼앗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숨통을 막아 우리를 그저 먼지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숨통을 막아버리기 위해 죄를 짓게 하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우리 영혼은 감옥에 감히게 되고, 하느님의 숨이 들어오는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참 생명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 계속 자유롭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설령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과 그분의 것들을 찾지 않고, 지상의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쏟게 합니다. 그것들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삼게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돈과 재물, 이 세상의 것들의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이 지상에 사는 한 우리는 의식주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의식주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들일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가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해 주실 것입니다.(마태 6, 25-34 참조)
너희는 거룩함에로 불리웠고 천국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구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거룩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다고 말합니다.(1테살 4, 3. 7 참조) 베드로 사도 역시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 15)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거룩함에로 불리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 14)라고 말합니다. 거룩함이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조건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지상에 사는 동안 마음으로 주님을 뵙고,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의 두 눈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기 위해서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세의 천국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면 되고,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강조해야 할 점이라고 말합니다. 이 지상을 천국처럼 만들고, 이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것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지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현세의 것들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지상과 지상의 것들은 영원한 천국과는 절대로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발을 이 땅에 딛고 있으나 우리의 머리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이 지상이 아니고, 천국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천국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갈 수 있는 영원한 장소, 그 천국입니다. 주님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뵙고, 주님과 성모님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그 천국을 구하라고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 지상에서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행복과 평화를 누리려면 지상의 것들이 아니라 천상의 것들을 구하라고 우리를 말씀하십니다.
2017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와 축복을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받은 은총과 은사들을 살며 증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기쁨으로 가득 찬 증거자, 또 평화와 희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내 아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와 축복을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오고 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예수님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성모님은 나자렛 출신의 처녀였습니다. 그 당시 나자렛의 인구은 4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라고 말했을 때,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고 말한 것을 보면(요한 1, 45-46 참조), 나자렛은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동네에 불과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작은 동네 나자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를 당신 아들 예수의 어머니로 선택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전언 대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예수님을 낳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는 메시아로 세상에 태어나야 하기에 다윗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을 나자렛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은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시기 전에 이미 약혼한 사이인 요셉이 속한 다윗 가문의 호적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노의 명령에 따라 마리아께서는 남편 요셉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낳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예수님께서 다윗 왕의 출생지이며, 다윗 가문의 호적지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을 보면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금 주목할 것은 베들레헴 역시 그리 큰 마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인구 4만명이 살았던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8km 남단에 위치한 베들레헴의 당시 인구는 겨우 3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태어나시도록 준비하셨고, 역시 작은 마을 출신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당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제외하고 첫 번째로 아기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베들레헴 인근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 일에 관해 루카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 8-20)
목자들은 주님의 천사가 들려주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님을 뵙고 대단히 기뻐했으며 하느님을 찬미 찬양했습니다.
2천년 전에 있었던 이 사건은 그저 과거의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아닙니다. 나자렛 처녀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당신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인 구세주 예수를 낳아주시고, 목자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었던 그 사건이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바로 메주고리예를 통해 이 세상에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현재 인구 3500명의 메주고리예는 1981년 성모님 발현이 시작되고 15년 간 그 3분의 1의 숫자가 증가한 것입니다. 이를 감안하면 성모님 발현이 시작된 1981년 당시 메주고리예에는 적은 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 이전까지 메주고리예는 나자렛이나 베들레헴처럼 작은 마을이었고, 인구도 매우 적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메주고리예를 오늘날의 새로운 베들레헴으로 선택하시어 성모님 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처럼 우리도 메주고리예로 달려가 성모님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느님, 평화의 왕, 구세주로 살아 계심을 믿고, 그분은 우리의 주님으로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받은 은총과 은사들을 살며 증거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기쁨으로 가득 찬 증거자, 또 평화와 희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총은 바로 그분의 자비로우신 사랑이요 그분 자신이십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서 우리에게 호의로 거져주어지는 것이기에 늘 감사하게 받아야 하고, 귀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선을 위해서 우리 각자에게 다른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겸손되게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사용할 때, 그 은사들은 주어진 목적에 알맞게 사용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도 알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교인이었을 때에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 정신없이 휩쓸렸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 1-11)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호의로 우리에게 은총과 은사들을 내려주셨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우리 안에 간직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잘 활용될 필요가 있습니다. 받은 은총과 은사에 대한 감사와 활용은 곧 그것들을 주신 하느님에 대한 증거로 이어집니다. 각자 받은 은총과 은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 먼저 잘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감사 드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을 위해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봅시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갈라 5, 25)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그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례와 견진을 통해 성령을 충만히 받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늘 그분의 인도를 청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두려운 마음이 들면 바로 무릎을 꿇고 성령께서 오시어 그 두려움을 물리쳐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 22-23) 따라서 마음을 다해 성령께 기도하며 이 열매들을 청하면 성령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와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이 주신 은총과 은사를 살며 기쁘게 이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떠한 순간에서든지 평화를 추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2017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너희를 기도에로 부른다. 기도하고 평화를 구하여라. 너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여기 이 땅에 오셨으며 너희의 형제이신 내 아들은, 하느님 없이 너희에게 미래나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며 그분과 너희의 개인적 만남에 대한 기대와 은총 속에서 살아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너희를 기도에로 부른다. 기도하고 평화를 구하여라.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은총입니다.”라는 어느 자선 단체의 구호가 생각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해서 얻어 먹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구걸을 할 힘이라도 있으니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호에 비하면 우리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은총으로 다가옵니까? 비록 매일 지지고 볶을지언정 함께 사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은총으로 여겨져서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어디 좀 불편한 데가 있어도 그래도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는 건강을 은총으로 주신 하느님께 고마워하고 있습니까?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열심히 일해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힘과 직업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힘이 있습니다. 다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현재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한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의 시기에 우리를 기도에로 부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힘을 우리의 육신을 넘어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한해를 마감하는 연말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소홀히 했던 기도 생활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값지게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종 송년 모임과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각종 파티와 음주 오락 등으로 흥청망청하며 정신없이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모든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성모님과 함께 앉아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한없이 바쳐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우리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너희에게 그분의 평화를 주시기 위해 여기 이 땅에 오셨으며 너희의 형제이신 내 아들은, 하느님 없이 너희에게 미래나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나를 통해 너희를 부르고 계신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 1-4)
이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별 믿음없이 사는지, 선하게 사는지, 죄 속에 사는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인지, 혹은 천상의 것들을 그리워하는지, 아니면 지상의 것들에 온통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 있는지 등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2위이신 성자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부정적이고 죄스러운 것까지도 모두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것들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고, 우리의 형제가 되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황송한 일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 혹은 노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사랑 덕분입니다.
이 자비와 사랑에 감사드리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삶의 중심에 있던 예수님 아닌 것들을 모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며, 오직 그분만이 모든 것 위에 최고가 되실 수 있도록 우리 삶의 우선권을 예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이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과감하게 없애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과 화해한 사람이고, 하느님을 자신의 삶에 모셔 드리고 그분을 첫 자리에 모신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의 삶을 움직여가십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
하느님께서 동반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사람의 인생은 밝은 미래가 있고, 그 미래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천국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회개할 때 이루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통해 지금 바로 우리가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며 그분과 너희의 개인적 만남에 대한 기대와 은총 속에서 살아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기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서로 친해지기 위해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예수님과 친해지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시간 없이 절대로 예수님과 친해질 수 없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그분과의 개인적 만남에 대한 기대와 은총 속에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17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너희 모두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고, 평화가 부족하다. 성인들이 너희에게 모범이 되고 거룩하게 살도록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고, 너희는 너희 자신의 회개를 통해 구하는 가운데 쇄신될 것이다. 신앙이 너희에게 희망이 될 것이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기도가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너희 모두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고, 평화가 부족하다. 성인들이 너희에게 모범이 되고 거룩하게 살도록 너희를 격려하기 바란다.
성모님께서는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도 자체가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우리에게 기도가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고, 평화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우리의 문제, 괴로움, 고통에 답과 힘이 되어 주고, 기도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성인들 역시 우리처럼 이 지상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분들 역시 우리처럼 문제, 괴로움, 고통을 체험했고, 때론 평화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그럴 때마다 성체 앞으로 달려 갔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묵주를 손에 들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충만한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모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죄 말고는 인간의 모든 조건을 체험하셨고, 성모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이 지상에서 사셨기에 인간이 어떠한 문제와 괴로움 그리고 고통을 겪는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문제, 괴로움,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성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이시기에 제3자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자녀의 문제, 괴로움, 고통은 부모의 것이기도 한 것처럼, 아니 육신의 부모들보다 더 우리의 문제, 괴로움,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우리에게 평화가 부족한 것을 안타까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기도와 성인들을 모범을 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가까이 계시고, 너희는 너희 자신의 회개를 통해 구하는 가운데 쇄신될 것이다. 신앙이 너희에게 희망이 될 것이고, 기쁨이 너희 마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이 늘 그들 가까이에 있었음을 믿고 체험했던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을 본받고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거룩하게 살려고 애썼고, 매일매일 매순간 회개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쇄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문제, 괴로움 그리고 고통을 안고 있을지라도 하느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늘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온갖 문제와 괴로움 그리고 고통이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 35-37)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 4)
2017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유혹을 받고 있는 너희의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고 단식하며 기도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사제들과 모든 수도자들이 예수님을 더욱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시며, 그들이 천국과 천상의 신비들을 증거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나는 특별히 너희에게 애원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죄 중에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채워 지도록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유혹을 받고 있는 너희의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고 단식하며 기도하라고,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지난 달 8월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사탄은 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 때문에 더욱 더 기승을 부리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이 사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시지는 않지만 “유혹을 받고 있는”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간접적으로 사탄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탄은 이미 세상 창조 때부터 유혹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최초의 인류의 어머니 하와를 유혹하여 그 남편 아담과 함께 원죄를 짓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다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성자 예수님을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유혹을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의 유혹들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사탄은 그에게 허락된 마지막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에 빠뜨려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술과 마약을 비롯한 각종 약물 중독, 부도덕한 성적 문란, 도박, 인터넷과 게임 중독, 재물과 명예에 대한 탐욕 등의 온갖 악으로 그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탄이 유혹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심지어는 그 유혹에 넘어가 죄에 떨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그 유혹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죄와 사탄을 끊어버리고, 단식하고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포기, 단식 그리고 기도가 유혹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힘을 준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메시지에 응답하기 위해 우선 우리 주변에서 유혹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그리고 세상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이름모를 또 다른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매일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단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을 겪고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연대는 우리 가운데서 사탄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게 하는 큰 힘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키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한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도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여느 다른 형제자매들과 다름없이 나약한 존재이고, 사탄은 우리 역시 죄와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유혹에 들게 합니다. 물론 그러한 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 41)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 스스로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런 것처럼 또 다른 형제자매들이 사탄의 유혹을 겪고 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포기하고 단식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로부터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모든 수도자들이 예수님을 더욱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시며, 그들이 천국과 천상의 신비들을 증거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나는 특별히 너희에게 애원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문헌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서론에서 사제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직무를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궁전으로 이 지상에 끊임없이 세워지고 있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내리신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들은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이 지상에 모셔오고, 고해성사를 비롯한 각종 성사 집전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와 은총의 강물이 하늘에서 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게 하는 임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 선포를 통하여 예수님의 복음이 이 지상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그 복음의 축복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예수님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없으면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사제들의 존재는 교회의 존재와 성장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수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부터 교회에는 복음적 권고를 실천함으로써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더 가까이에서 그분을 본받고자 하여, 각자 나름대로 하느님께 봉헌된 생활을 하는 남녀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독수 생활을 하거나 수도 가족을 일으켰다. 교회는 그 권위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승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놀랄 만큼 다양한 수도 단체들이 생겨나고 발전하였다.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가 온갖 선행을 하게 하고(2티모 3,17 참조),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에페 4,12 참조) 준비하는 데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치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교회가 자녀들의 갖가지 은혜로 꾸미고 나타나며(묵시 21,2 참조),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에페 3,10 참조).
이와 같이 다양한 은혜 가운데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고 그 실천을 충실히 서원한 모든 이는, 동정이시고 가난하시며(마태 8,20; 루카 9,58 참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참조) 인간을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를 하느님께 특별한 방법으로 봉헌한다. 이렇게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부어 주시는 사랑에(로마 5,5 참조) 감동하여, 더욱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콜로 1,24 참조). 생활 전체를 포함한 자기 봉헌으로 그들이 더욱더 열렬히 그리스도와 결합될수록, 교회 생활은 그만큼 더 풍요로워지며, 그 사도직은 그만큼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러한 존재들인 수도자들은 우리 교회의 보물이고 꽃입니다. 그들의 봉헌과 기도 그리고 복음적 삶의 모범을 통해서 교회 다른 구성원 모두가 영적으로 큰 도움을 받고 큰 감화를 받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제들과 모든 수도자들이 예수님을 더욱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특별히 우리에게 애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모님은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냥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열정적인 사랑, 아니 예수님께 대한 보다 더 열정적인 사랑, 그것이 모든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말씀은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면서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하신 복음 이야기를 저절로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예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 요청대로 모든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온 마음을 다해 더욱 더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세상적인 기쁨으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천상적인 기쁨만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만이 그들을 행복할 수 있기에 성모님 말씀대로 성령께서 그들을 천상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어떤 사제나 수도자가 세속적인 기쁨을 쫓느라 참된 행복 속에 살고 있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하느님 아버지께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께 천상 기쁨을 채워주시도록 간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은 세속의 지식이나 인간적인 지혜를 넘어서서 천국과 천상의 신비들을 말과 행동으로 힘차게 증거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무를 잘 완성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로 천상 것에 맛들려 그를 증거하는 그들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천상 것에 더욱 마음을 쓰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을 영적으로 돕는 것이 우리 자신을 돕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죄 중에 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채워 지도록 기도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악을 많이 저질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성적인 문란과 남색 동성애 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내려와 그 도시들 안에 사는 사람이 모두 죽고,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전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그 도시들을 벌할 계획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소돔에 의인 오십 명이 살고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벌을 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점점 줄어 들어 마흔 다섯, 마흔, 서른, 스물, 마침내 열 명의 의인이 있다면 소돔을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돔에는 의롭게 사는 사람 열 명이 없어 결국 하느님의 벌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고, 아브라함 덕분에 그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은 재앙 전에 소돔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성경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수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그를 뉘우치거나 개선할 여지를 보이지 있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고, 죄 중에 있는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올해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세 명의 발현목격증인 루치사, 히야친타 그리고 프란치스꼬에게 여섯 번 발현하셨던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님 발현 100주년되는 해입니다. 이 발현의 여러 가지 메시지가 있지만 주요 메시지는 세상이 죄로 가득하여 하느님의 분노의 잔이 넘치고 있으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메주고리예에서 같은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죄 중에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아브라함, 소돔의 의인이 되어 죄 중에 있는 영혼들이 회개하여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많은 희생과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주님께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 9 참조)라고 말했던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인종, 종교, 성별, 피부색, 언어, 국적,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누군가 죄 중에 있고, 파멸의 길로 가고 있다면 우리도 그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시기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 역시 죄 중에 있는 모든 이들이 회개하도록,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기쁨을 채워 주시도록 성모님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고 희생을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7년 8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가 너희에게 기쁨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과의 만남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그분께서 너희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주시고, 너희는 사랑과 평화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너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어 한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만남의 비밀 열쇠라는 것을 너희는 잊지 마라. 그 때문에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라고 너희를 부르고 있다. 기도가 너희에게 기쁨이 되고 지극히 높으신 분과의 만남이 될 때까지 기도하여라. 그분께서 너희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주시고, 너희는 사랑과 평화의 사람들이 될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도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번듯한 직업이나 지위 혹은 돈과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면 그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의 사람들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어떤 인간적인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실제로 매일 같이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 누구나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기도의 사람들이 된다면 우선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늘 맛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참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면 우리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되고, 그분이 주시는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줄 수 없는 기쁨이고, 이 기쁨은 우리를 더욱 깊은 기도에로 인도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만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은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 저 멀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면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만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하느님 마음처럼 바뀌게 됩니다. 마치 고철이 용광로에 들어가 녹으면 그 형체는 사라져 없으나 용광로의 끓는 쇳물이 되고, 그 이후 다른 모양의 새로운 물건이 되기 위해 조주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면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듯이 다시금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 26)
기도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불안 등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냅니다. 대신 기도는 사랑과 평화를 비롯한 긍정적인 모든 것들을 우리 마음에 자리 잡게 만듭니다. 기도를 통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기도의 효과가 크다면 왜 기도하기를 망설이는 것입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성모님 부르심 대로 기도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바로 기도를 시작합시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은 강하고, 너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어 한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만남의 비밀 열쇠라는 것을 너희는 잊지 마라. 그 때문에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가 굳은 결심을 해도 종종 죄에 떨어지고 기도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약한 탓도 있지만 사탄의 힘이 늘 우리에게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존재과 힘을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할 만큼 교활하기 때문에 아주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떨어지게 하고,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느님과 가까와지고, 하느님 편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방해합니다. 예컨대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기 보다는 텔레비젼이나 영화, 인터넷이나 잡지 혹은 게임에 몰두하게 만들고, 세상적인 즐거움이 있는 곳에 시간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또 바쁘거나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계속 기도하는 것을 다음으로 미루게 만들면서 기도에 소홀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계속 지내다보면 기도에 대한 흥미도 잃게 되고, 너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기도하고 싶은 열망도 가지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얼마만큼 기도하고 있는가, 우리 안에 얼마나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있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사탄이 얼마만큼 깊숙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다시 기도하고, 우리를 기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여러 가지 습관들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아무 열쇠로나 모든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모든 문마다 그에 걸맞는 열쇠가 있고, 그 열쇠가 있어야 문이 제대로 열립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의 비밀 열쇠는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기도만이 우리와 하느님과의 만남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이처럼 중요한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기도하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포기하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포기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에 너희를 인도하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마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더욱 더 분발하여 기도합시다.
2017년 7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가 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어린 자녀들아, 충실하고 결연하게 회개하고, 완덕 생활이 너희를 위한 진리가 될 수 있도록 힘써라. 또 지상에서 너희의 삶이 더욱 즐거울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선을 행하면서 서로 격려해 주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기도가 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언어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친해지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을 넘어서서 기도 그 자체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 그 자체가 되려면 우리 기도의 양과 질이 얼마나 압도적이어야 하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적당히 바치는 기도로는 이를 이룰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바치고 있는 기도의 양과 질에 만족해서도 안 되고, 배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대단히 감사한 일이고 큰 영예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들만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 모든 이들이 당신을 아버지로 받아 들이고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또 그를 위해 우리를 도구로 쓰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시는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명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분의 사랑을 반사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반사체가 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바치는 봉헌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그분께 우리를 온전히 의탁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늘 머물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충실하고 결연하게 회개하고, 완덕 생활이 너희를 위한 진리가 될 수 있도록 힘써라. 또 지상에서 너희의 삶이 더욱 즐거울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선을 행하면서 서로 격려해 주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우리 인생에서 회개는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회개한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앞으로 있을 수 많은 회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회개는 일생에 걸쳐 계속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회개는 늘 변함없는 우리의 충실함과 확고한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 44)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완덕 생활의 목표는 거룩한 사람, 즉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충실하고 결연하게 회개하고, 기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하며,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이것만이 완덕 생활의 목표에 이르게 만드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이 지상의 삶은 사라져가고 있으며, 당신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더욱 더 즐겁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하느님 안에서 함께 더욱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지상에서 너희의 삶이 더욱 즐거울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선을 행하면서 서로 격려해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선을 행하면서 서로 격려해 준다는 것은 모든 인간 관계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심을 인식하고, 그분의 능력과 섭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또 마음 안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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