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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는 꽃과 같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른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또한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가져다주어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서 너희 삶에서 만나게 하신 이들에게 선을 행하며 빛과 기쁨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는 꽃과 같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른다.
겨우내 모든 잎을 떨구어냈던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따뜻한 봄기운의 위대함을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무뿐만 아니라 작은 들꽃과 풀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기운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서는 절대로 자라거나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창조주,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철저히 나 자신을 맡겨드리자는 다짐도 해보았습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시편 127,1)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는 꽃과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철저하게 의탁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운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간직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살게 만들고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세상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식을 하든 못하든 그 사랑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여전히 성장시키고 살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생명과 성장의 양식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또한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가져다주어라.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주고, 희생하며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기운으로 핀 봄꽃들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하여 아름다운 영혼의 꽃을 피운 사람들, 하느님처럼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먼저 우리 안에 생명을 주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지니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없기에 성모님께서는 “너희는 또한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가져다 주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아무에게도 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서 너희 삶에서 만나게 하신 이들에게 선을 행하며 빛과 기쁨이 되어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하라고 말씀하신 성모님께서는 이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그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마태 26,39)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희생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 잉태 예고를 받으시던 순간 성모님은 깊은 기도에 잠겨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받아들이신 하느님의 뜻은 자신들을 희생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난과 박해,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만나게 해주신 이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너무도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미워하거나 적대시하거나 배신하며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심한 공격과 박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심지어 이러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성모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상기시켜줍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5, 44-48)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빛이 되고, 기쁨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빛 그 자체이시고 참된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빛과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그분의 뜻을 찾으며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늘 자신 안에 하느님을 모실 수 있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빛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4-16) 예수님은 우리가 어둠을 저주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한 자루일망정 촛불을 든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2008년 3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 자신의 회개를 위해 힘쓰라고 너희를 부른다. 너희는 여전히 마음으로 하느님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를 변화시키고 너희 마음에 살아 있는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어 주시도록,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흠숭하고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쳐라.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은 사라져 가고 있고 오직 하느님만 사라지지 않으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사랑으로 너희를 격려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 자신의 회개를 위해 힘쓰라고 너희를 부른다. 너희는 여전히 마음으로 하느님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재의 수요일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으며 사제로부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라는 말씀을 듣고 회개와 보속을 사순절을 시작했고, 지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팔일 축제를 지내는 이틀째 되는 날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회개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거듭 경축하고 있는 이때 우리 자신의 회개를 위해 힘쓰도록 요청하시는 성모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부활절 아침으로 다시 데려가는 듯싶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안식일 다음날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고, 두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사도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야기를 헛소리로 여겼고,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루카 24,9-12) 심지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했지만 그 가운데 더러는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태 18,17)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직접 자신들의 귀로 전해 듣고, 부활하신 그분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도들에게 여전히 불신앙과 의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회개의 여정이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줍니다.
우리의 회개는 단 한 번의 고해성사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만나려고 하고, 그분을 우리 삶과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지 않는 한 우리의 회개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회개의 여정은 매일매일 계속되고,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를 변화시키고, 너희 마음에 살아 있는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어주시도록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흠숭하고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바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자신의 약함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로마 7,15.24) 그러면 누가 우리의 연약함과 비참함에서 우리를 구해주실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로마 7,25)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도록 더 많은 시간 기도하고, 제단으로 나아가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공경하며 그 앞에 머물도록 초대하십니다. 기도는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맡겨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 마음 구석구석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우리 마음에 살아 있는 신앙을 넣어주십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특별히 성체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성체 앞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사랑 고백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머물고, 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해야 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성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집인 성당의 제대로 우리의 발길을 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분과 함께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 목요일 최후 만찬 때, 사도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기 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루카 22,31-32)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환히 들여다보시고, 우리에게 살아 있는 신앙을 불어넣어주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성체 앞에 나아가 우리의 연약함을 간절히 호소하면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 마음에 살아 있는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일으켜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어린 자녀들아, 모든 것은 사라져 가고 있고, 오직 하느님이 사라지지 않으신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어 주시도록 더 많은 시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인간적으로 갈망하고 고대했던 것들로 가득했던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지나간 한바탕의 꿈처럼 여겨집니다. 성모님 말씀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지금과 앞으로의 모든 시간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모님께서 매주 목요일마다 성체 앞에서 읽도록 요청하신 다음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 6,25-34)
2008년 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다시 한 번 기도하고 포기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바치는 작은 양의 열렬한 기도로 너희의 하루가 엮어지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이 은총의 시기에 나는 다시 한 번 기도하고 포기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지난 1월 메시지에서처럼 성모님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사순절이 은총의 시기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순절은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은총의 시기임을 더욱 깊이 새기기 위해 이 비유를 묵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 재산을 미리 달라고 청합니다. 아버지는 순순히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작은 아들은 먼 고장으로 가서 온갖 즐거움을 맛보며 자신의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드디어 돈이 모두 떨어지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심지어 배를 곯기까지 했습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 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 작은 아들은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든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잔치를 준비하도록 명합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동적이지만 이 비유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청을 들어주시고,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당신을 멀리하고 죄에 빠져 있을지라도 인간에 대한 걱정과 연민을 멈추지 않는 분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멀리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던 아버지처럼 하느님은 늘 우리를 염려하시고, 우리가 당신께 다시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절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연민을 깨닫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시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 그리고 은총이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겠습니까?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우리에게 그 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순간 자신이 그 동안 어떤 악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는지 성찰했습니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용서와 자비를 구하기 위해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집으로 향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난 26년 8개월 동안 성모님께서 메주고리예를 통해 주고 계시는 메시지 가운데 계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회개입니다. 평화의 모후께서는 우리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작은 아들처럼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다시 권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성모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포기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지난 1월 메시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죄를 끊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여라.”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포기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모든 악과 죄입니다. 풍요로운 현대를 사는 우리를 악과 죄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이기주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통해서 이미 여러 차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는 물질적인 것이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1986년 4월 17일)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여전히 이 세상 것에 집착하고 영적 생활에는 관심이 없다....어린 자녀들아, 죄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너희는 회개할 수 없다.”(2002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가, 그 무엇보다도 특히 하느님을 사랑하기로 다시 결심하도록 초대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특히 소비주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참된 가치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고 산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그러므로 너희 삶에서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도록 다시 초대한다. 어린 자녀들아, 사탄이 물질적인 것을 통해 너희를 공격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자유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여라. 어린 자녀들아 영혼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여라.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하는 이 시기에, 부활을 통해 꽃피게 된 생명을 선택하도록 초대한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줄 회개를 통해, 오늘 너희 삶이 새로워지게 하여라.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1996년 3월 25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물질적인 것이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은커녕 오히려 죄만 짓고 불행에 빠졌습니다. 그에게 참된 행복을 줄 수 있는 분은 물질이 아니라 아버지임을 깨닫고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삶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물질만이 필요합니다. 이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성모님은 우리에게 단식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단식은 우리를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 5,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아들처럼 과거를 청산하고, 죄를 끊어버리며 아버지의 집으로 발길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이 충만하게 내립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 (마태 5,45)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거나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당신의 은총과 사랑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비록 그 양이 작을지라도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열렬하게 바치는 기도로 너희의 하루가 엮어지기를 바란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인종, 민족, 국적, 성별 그리고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모든 민족들의 어머니, 만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자녀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회개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그들에 대한 사랑이 먼저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자기 동생을 못마땅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죄 중에 있는 동생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던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하면 그 효과가 반드시 있음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죄 중에 있던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했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의 회개를 위해 바치는 기도는 반드시 그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족 가운데 죄에 빠져 있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바치는 그 중재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루카 1,37)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양이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다해 열렬하게 중재의 기도를 바친다면 그 기도는 하늘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중 많은 부분이 우리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비록 그 양이 작을지라도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열렬하게 바치는 기도로 너희의 하루가 엮어지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타인, 그 가운데서도 아직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로 우리의 하루가 가득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영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어줍니다. 기도에서마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그 사랑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아버지, 제가 바로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물질에 집착하고, 온갖 죄를 지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 작은 아들입니다. 이제 저는 저의 모든 죄와 잘못을 고백합니다. 작은 아들처럼 당신께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언제나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 이제 발길을 돌려 당신께로 향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먼발치에서 보시고 달려가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셨던 것처럼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는 저를 받아주시고 안아주십시오. 이제 저는 또 당신의 또 다른 작은 아들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성모님의 요청대로 아직까지 당신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 모두가 회개하여 당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08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순 시기와 함께, 너희는 은총의 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너희 마음은 일구어진 땅과 같고, 선한 것으로 자랄 열매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하고 단식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기쁨을 심어라. 그러면 너희의 선익을 위하여 기쁨의 열매가 너희 마음 안에서 자라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되며 너희의 삶을 통해 기쁨의 열매를 전해 받게 될 것이다. 죄를 포기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사순 시기와 함께, 너희는 은총의 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는 사람이기에 그분의 삶은 곧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고, 그분께서 걸으신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 특별히 가톨릭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자신들의 것으로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전례력을 통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합니다. 대림절로 시작되는 교회의 전례력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생의 중요한 발자취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만들어 줍니다. 성모님께서도 이 흐름에 따라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사순 시기와 함께 우리가 은총의 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희생적 사랑과 자비에 우리 자신을 의탁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에 은총의 시간입니다. 또한 사순절은 죄를 끊어버리고 회개하여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주는 시기이기 때문에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런 의미의 사순절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은총의 시간이 되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오로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 십자가에는 나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전제조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즉,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회개하고 더 이상 죄 속에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사랑과 자비의 큰 은총이 쏟아집니다.
너희 마음은 일구어진 땅과 같고, 선한 것으로 자랄 열매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하고 단식하라고 너희를 부른다.
성모님은 우리의 마음이 이미 일구어진 땅과 같고, 선한 것으로 자랄 열매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하시면서 동시에 도전을 가해 오십니다. 그 동안 성모님의 메시지를 따라 살면서 우리 마음을 잘 일구었고, 선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선과 악을 늘 선택해야 하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악이 아니라 선을 늘 선택함으로써 잘 일구어진 우리 마음의 밭에서 선한 열매가 맺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기도와 단식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악으로 유인하기 위해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천국에서 사는 것 같다가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돌아보면 그때는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단식하지 않은 때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계속해서 기도하고 단식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기쁨을 심어라. 그러면 너희의 선익을 위하여 기쁨의 열매가 너희 마음 안에서 자라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되며 너희의 삶을 통해 기쁨의 열매를 전해 받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에 기쁨을 심을 수 있을까요? 성모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미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통해 하시는 모든 일에 너희 마음을 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하여라. 그러면 너희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너희 각자를 통해 하시는 그 모든 일에 감사 드리며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989년 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너희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맡기라고 너희를 부른다. 너희가 지닌 것들을 모두 하느님의 손 안에 맡겨드려라. 그래야만, 너희 마음이 기쁘게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가 지닌 모든 것에 대해 감사드려라.”(1989년 4월 25일) 이 메시지들을 통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우리 마음에 기쁨을 심는 도구는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 그리고 감사입니다. 참된 기쁨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느님께 열려있고, 우리의 모든 일과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감사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영적인 기쁨은 우리의 삶을 활기차게 만들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으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 16-18)
죄를 포기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여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내 아들 앞에서 너희를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와 영원한 생명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죄를 선택하든지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과 악, 죄와 영원한 생명 그리고 사탄과 하느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양쪽에 다리를 걸치는 중립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를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성모님은 나약한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죄를 포기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여라.” 내일이나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그리고 짧지만 결연하게 다음과 같이 소리 내어 서약합시다. “하느님, 저는 성모님의 전구와 도우심에 힘입어 죄를 끊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선택합니다.”
2007년 12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께서 당신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해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분을 흠숭하고 너희가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창조주께 시간을 내드려라. 너희는 이 지상의 나그네이고 내 아들을 통해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과는 달리, 지상의 것들은 너희에게 작은 기쁨 밖에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너희 마음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으로 너희를 이끌어 주기 위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께서 당신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해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에게 덕담을 건넵니다. 그럼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요?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008년 새해를 코 앞에 둔 시점인 2007년 12월 25일 예수님의 성탄절에 주어진 메시지에서 성모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평화의 왕께서 당신의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해 주시도록, 그분을 너희에게 모셔올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도록 그분을 우리에게 모셔오는 것이 성모님께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성모님을 더욱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성모님께서 평화의 왕,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모셔오신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우리 마음과 삶,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 안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을 흠숭하고 너희가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창조주께 시간을 내드려라.
모든 피조물은 다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최고의 걸작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는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든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안에는 하느님께 대한 기본적인 갈망이 늘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를 흠숭하게 되면, 그분을 닮은 우리의 모습이 점점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그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흠숭하고 그분께 시간을 내드리는 구체적인 행위는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온전히 그분만을 위해 마련된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유, 성체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흠숭하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하는 구체적인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는 이 지상의 나그네이고, 내 아들을 통해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과는 달리, 지상의 것들은 너희에게 작은 기쁨 밖에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로서 이 지상을 거쳐 영원한 집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천국에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 지상의 것들은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도구가 마치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여겨질 때 문제가 생깁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고 섬겨서는 안 됩니다. 또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며 하느님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시편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 인생은 근력이 좋아야 80년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예외 없이 나그네로서 이 지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이 지상의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빈손으로 떠나되, 마음과 영혼에는 각각 다른 것을 지니고 떠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께 전적으로 모든 삶을 맡기고, 그분께서 주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이들은 영적으로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너희 마음이 그리워하고 있는 것으로 너희를 이끌어 주기 위하여,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성모님의 호칭 가운데 하나가 ‘바다의 별’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목적지에 올바로 도달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해주는 별처럼, 성모님은 우리가 죄와 어둠 속에 빠지지 않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하느님의 은총이고, 선물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바다의 별이신 어머니 마리아여, 눈물의 골짜기, 이 지상에서 귀양살이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굽어보시어, 언제나 저희와 함께 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로 저희를 늘 인도하소서. 아멘.
2007년 11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모든 피조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경축하는 오늘, 나는 그분께서 너희 삶의 왕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한다. 어린 자녀들아, 오직 줌으로써만, 너희는 너희 각자를 위한 예수님 십자가 희생의 선물을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자녀들아, 하느님께서 너희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그분의 은총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주시도록 그분께 시간을 드려라. 그러면 너희는 다른 이들을 위한 은총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나는 너희와 평화가 없는 이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있는 은총과 사랑의 선물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찬미 예수님!" 성모님께서 즐겨 하시는 인사말입니다. 성모님의 이 인사말대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찬미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생명과 구원을 생각하면 우리의 목숨과 모든 시간을 다해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고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왕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왕이 되시려면 그분 앞에 우리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야 합니다. 그분이 언제나 최고가 되셔야 합니다. 그분의 뜻과 말씀이 우리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다스리고 이끄시도록 맡겨드려야 그분이 진정 우리 삶의 왕이 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왕이시지만 세상의 왕들이나 권력자들과 달리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 6-10)
예수님의 겸손은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 안에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모든 피조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경축하는 오늘, 나는 그분께서 너희 삶의 왕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한다. 어린 자녀들아, 오직 줌으로써만, 너희는 너희 각자를 위한 예수님 십자가 희생의 선물을 이해할 수 있다.”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자기 삶의 왕으로 모실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겸손하고 내어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특별히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물론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직 줌으로써만, 너희는 너희를 위한 예수님 십자가 희생의 선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로 성모님은 그 길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오직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 각자를 위한 예수님 십자가 희생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그 의미를 체험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돈과 시간을 씁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면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드리고 있는지 따져보면 됩니다. 그럼 하느님께 시간을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과 마주 앉아 대화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영혼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어두운 모든 곳을 두루 밝혀 주시어 평화와 선으로 가득 차게 하십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하느님을 더욱 갈망하게 되고, 하느님은 그 안에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십니다.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고, 그 시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면, 하느님은 우리를 ‘오직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꾸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은총이 됩니다. 결국 하느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며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인류가 하느님이시며 사람이 되신 예수님,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희생을 통해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겸손 그리고 평화의 길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주고리예를 통해 계속해서 이 땅에 오고 계시는 평화의 모후께서는 이번 달 메시지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우리 삶의 왕으로 모시라고 촉구하십니다. 또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보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과 평화의 길을 본받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구원과 평화의 길을 알려 주시는 성모님의 존재와 발현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총과 사랑입니까!
2007년 10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시어 너희를 구원하고자 하신다. 너희 가운데 많은 이들은 마음을 열고 내 메시지를 받아들였지만, 많은 사람이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사랑의 하느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어둠과 죄가 있는 곳에 사랑과 빛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고 너희 모두를 축복한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1981년 6월 24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메주고리예에 발현하고 계시는 성모님, 평화의 모후께서는 발현목격증인들을 통해 당신이 이 세상에 오고 계신 이유는 순전히 우리 인류의 구원 때문이라고 수 차례 밝히셨습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도 성모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이 이 세상에 오고 계시는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를 너희 가운데 보내셨다.” 성모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명을 받고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 (요한 2,5)라고 말씀하신 성모님은 지금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모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의 메시지입니다. 기도, 신앙, 회개, 보속 그리고 평화를 실천에 옮기고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라는 내용의 메시지입니다. 1981년 6월 24일 첫 발현 이래 지금까지 평화의 모후께서는 이와 같은 주제들을 담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의 길로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마음을 열고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것을 기뻐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하고 슬퍼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도 그들이 당신의 메시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걱정하고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당신의 자녀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랑의 어머니 성모님은 다시금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물질과 기계문명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화려하고 휘황찬란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은 어둠으로 가득하고 세상은 온갖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서 철저하게 하느님을 배제시키고 지상적인 것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성모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둠과 죄가 있는 곳에 사랑과 빛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사랑과 빛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죄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빛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지상의 모든 당신 자녀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고자 하신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또한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는 성모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송구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그분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합시다.
2007년 9월 25일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도 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너희 마음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라고 너희 모두를 부른다.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라. 어린 자녀들아, 묵상하고 기도하면 너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에 열리게 될 것이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사랑의 체험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번 달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당신의 십자가를 부둥켜 안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해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해골산에 오르시어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 당대의 죄인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포함하는 미래의 모든 죄인들의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기억하시면서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온 세기의 모든 인류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초대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오늘날의 나와 너,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벗으로 여기셨고, 당신의 벗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 계시면서 예수님과 함께 인류를 위해 기도하셨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이제 그 예수님께 우리의 사랑을 보이도록 초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라고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려봅시다. 십자고상을 가슴에 안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느껴봅시다. 십자고상에 입을 맞추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봅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이 가장 크게 드러난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 앞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깊이 묵상하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마음으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말씀하십니다. “어린 자녀들아, 묵상하고 기도하면 너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에 열리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사순절에만 등장하는 소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 삶과 신앙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세상을 봉헌하며 온 인류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또 그분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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