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들이 되어, 너희의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라. 나는 나의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며,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교회의 승인 하에)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며, 그들에게서 태어난 첫 형제는 카인과 아벨입니다. 카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우 아벨의 제물만을 기꺼이 굽어보시자 분노를 품게 됩니다. 그는 아우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결국 그를 죽입니다. 그 뒤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하며 모른다고 잡아뗍니다(창세 4,3-9 참조).
이 성경 이야기는 형제 사이의 갈등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함께 공존해야 하고, 서로의 생명과 안위를 지켜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구약성경 안에서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표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여겨 ‘야훼’ 대신 ‘엘로힘’이나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곧 인류 전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나의 대가족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교회 생활 속에서나 전례 안에서, 그리고 일상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이기에, 그로 인해 우리는 당연히 서로 형제자매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다면, “사랑하는 자녀들아! 오늘 나는 너희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너희를 부른다.”라는 성모님의 말씀이 결코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그 가운데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 또한 하느님과 성모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 가정의 한 일원으로서 그들에 대해 형제적 책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형제적 책임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성모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가 되고 축복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위해 한 번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와 축복 안에 언제나 그들이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지향은 나 자신과 내 가정을 넘어, 세상 모든 이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특히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사랑을 체험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의 안녕과 축복만을 구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세상 모든 이가 행복과 평화 안에서 살아가며 하느님의 축복이 언제나 그들 위에 머물도록 청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들이 되어, 너희의 삶으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라.
어린 자녀들아,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성모님 메시지 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평신도들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의 바리사이라 불리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참된 정신보다는 자신의 의로움과 신심을 앞세우며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3,1-36 참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라고 하실 때, 그 말씀 안에는 오늘날의 새로운 바리사이가 되지 말라는 경고 또한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세상 안에서도 스스로를 남들과 다르다 여기며 교만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오늘날에도 존재하듯, 바리사이 또한 오늘날 우리 안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다름’은 그러한 다름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서, 말투에서, 태도에서, 심지어 걸음걸이와 뒷모습에서조차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우리 자신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서도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될 때, 우리는 쉽게 또 다른 바리사이가 될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의 삶에도 선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과 평화에 이르도록 초대받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든지 아름답고 그럴듯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참되다면,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과 삶의 증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말보다 삶이 더 큰 힘을 지니며, 사랑으로 살아낸 삶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고 오래 지속되는 힘을 발휘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삶 자체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는 나의 모성적 축복으로 너희를 축복하며, 내 아들 예수님 앞에서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전구하고 있다. 나의 부름에 응답해 주어서 고맙다.
요즈음 성모님께서는 메시지의 끝에서 이 말씀을 반복하여 들려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축복하시고 전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 말씀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지금 더 큰 축복과 전구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전보다 더 힘겹고 어려운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겨움과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 안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며 예수님 앞에서 전구해 주시는 성모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합시다.